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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해석] 미드소 확인해볼까요
    카테고리 없음 2020. 1. 2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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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소마의 단점을 먼저 지적하면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과 학생들은 스웨덴 호르가 지방이라는 얼핏 보면 평온해 보이는 종교공동체를 방문한다.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분명해진다. 거짓없이 끝까지 하본인도 예상으로 칭찬해 본인은 없다. 더욱이[한 3일의 금요일]처럼 살육 장면을 직접 보이는 것도 한번밖에 없고 결과만 보인다. 말이 달리기 타이 외의 2시간 27분이 본 인 된다.무슨 재미로 이 영화를 봐야하지? 영화 속 땅의 진귀한 버릇을 감상하는 재미다. 이것이 정성스럽고 길게 묘사되지만 여기서 재미없으면 지루할 수도 있다.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서 20분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도 손수 왔다고도 살고 있는데, 이 영화를 끝까지 관 심로프게을 보려면 주인공들처럼 인류학적 관심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 땅의 해괴한 버릇은 감독이 마치 본인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드소마는 얼핏 유사 장르의 영화와 달리 종교공동체를 쉽게 악마화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홀이 마을이 갖는 치유 측면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홀거 마을의 교리와 제의는 비정상적이고 악마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종교적 정합성을 갖췄다. 따라서 큰 불행을 겪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대니가 마을에 와서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야만적인 제안이 어떻게 대니에게 마음의 평온을 줄 수 있었을까.한 살인제의를 하는 문명이 역사적으로 있었다. 이 영화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뷔페의 인신공양도 있고 남미 아즈텍의 인신공양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인신공양을 야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학자가 있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꼭두각시 혼이라는 책에서 현대문명이 아즈텍의 인신공양보다 드로 더 야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


    근대 이후 사람들은 혼돈의 세계에서 고통과 대나무 소음을 없애고 질서와 평화를 수립하는 것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이처럼 질서와 평화를 어느 정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우울, 불안, 고독에 찬 삶을 살게 되었다. 기만적인 목표에 스스로 속은 것이다 그러나 인신공여인 아즈텍인에게는 그런 기만적인 환상은 없었다. 아즈텍인의 목표는 고통과 죽음의 소음이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러한 불완전한 세계를 내면에 품기 위한 방법으로 살육을 한 것이다 ​


    현대인들은 고합격인 대나무 sound에 자신 있다는 것, 확실히 피해야 한다고 소견한다. 그래서 그걸 막고 미루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이러한 취향은 근대에 강해졌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대나무 sound를 고합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아무래도 불행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물증없는 믿음 sound를 갖게 되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사건은 아무리 도망쳐도 결말운명의 신에게 쫓기는 것이고, 그때 사람은 심각한 패닉에 빠져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부인해 온 만큼 더욱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 대니와 크리스천이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이 전형적인 현대인의 패턴, '부정'과 '무시'였다. 동생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대니와 크리스천은 별거 아니라고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이라고 부정합니다. 대니가 가족 사건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크리스천 칭구들은 관계를 끊으려고 해요. 대니는 가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울 sound가 터져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가족이라는 말을 절대 꺼내서는 안 된다. 불행은 하나 감추고 피하자가 현대인의 모토였다. 하지만, "미드 소마"의 홀가 공동체는 불행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가 되면 당연히 죽는다고 소견합니다. 그리고 대나무 sound로서 자연의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다고 소견합니다. 그것은 자신 없을지도 모르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죽 sound와 재생이 무한 반복 순환하는 것이었던 하지에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메이폴 축제는 이러한 죽 sound(겨울)와 부활(여름)을 기리는 행사였다. 거꾸로 걷는 것은 시간 순환에서 반복되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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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소리와 고통은 인생만큼 자신이 당연한 순환의 과정이기 때문에 숨기고 부정하고 돌아설 필요가 없다. 홀거촌은 저런 대나무 소리와 고통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구조화돼 있다. 인신 공양 제의는 저런 순환론적 세계관을 확인하고 내면화하는 절차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나무 소리와 고통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이 평범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대나무 소리를 피하려는 것은 사람, 아니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 아닌가? 어떻게 그 본성을 거역할 수 있지? 물론 정상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의 신비한 힘을 빌면 이 본성의 역행을 이뤄낼 수 있다. 그래도 회의적인 사람은 넘기지 않겠지만 대니처럼 끔찍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다르다. 고통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그런 신비로운 힘에 의존하는 1이 쉽게 된다. 지금처럼 고통과 불행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지 못하는 한 원시인과 고대인도 이렇게 죽 소리그와 고통을 인생의 1부로 받아들이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실제로 많았다.홀거가 공동체에서 성장한 펠레는 대니와 단둘이 이야기할 때마다 죽은 가족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 노인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니가 외면하고 부정한 것을 1프로파일 자꾸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순환 과정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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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신론적 교리를 믿는 이곳에서는 자연도 숨쉬고 인간과 일체가 된다. 대니는 손발에서 풀이 나고 과인은 환각을 보는 한편 메이폴 여왕이 되면 온통 꽃으로 장식된 옷을 입는다. 남자친구의 크리스천도 곰의 가죽을 입게 되고, 살해된 시체는 뜰에 과인무처럼 심어져 거과꽃처럼 꾸며진다. 영화에는 이처럼 인간 고유의 개체성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듯한 장면이 많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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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나무의 나뭇잎처럼 자연의 부분 1뿐이라에 개체는 의의가 없는 것이었다. 절벽에 떨어져 자살한 노인들의 체면을 구기는 의식은 이런 개체성을 지우자는 뜻인 것 같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낀다. 다리가 부러진 노인이 아파 소리를 지르면 다른 신도들도 함께 울부짖는다. 크리스천과 마야의 성교 의식에서도, 다른 여자들도 함께 신 sound를 내는가 하면, 대니가 슬픔에 통곡하면, 다른 여자들도 함께 통곡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기뻐하면 세상 모두가 기뻐하고, 내가 상처받으면 세상 모두가 상처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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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의 줄기에 매달리고 있는 곳을 전개했다 졌다를 반복하는 나뭇잎과 꽃은 이러한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에서 즐겨 사용하는 상징이었다. 나뭇잎이라는 개체는 떨어져 낙엽이 되어 사라지지만 같은 줄기에 새 나뭇잎이 자란다. 개체는 죽지만, 나무는 영원하다. 태양도 이런 세계관에서 많이 쓰이는 상징이지만 모든 생명력이 이 1의 원천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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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자들은 이 궁극의 근원이 1시적으로 분리된 양상을 띠고 있는 것 1뿐이었다 개체로서의 자아 의식은 환상 1뿐 세상 만물은 본질적으로 하 쟈싱. 이는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핵심 교리의 범 1별로(범아 일여)과도 유사한 데는 그곳에서 브라만을 쟈싱의 내 태양처럼 근원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근원 the source라는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고장 장애를 가진 아기는 이 근원의 소음을 직접 듣는다고 하잖아요. 인간적인 인식 능력, 즉 개체성에 의한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시야가 해1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기를 낳기 위해 이 땅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근친상간을 할 것입니다.이런 세계관 아래서는 살인도 죄가 아닐지 모른다. 죽음은 인간은 자연의 또 다른 형태로 되돌리는 11뿐 본질은 결말 하쟈싱 때문이다 반대로 살인을 굳이 할 필요도 없는데 개별자의 이기심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지 다만 이런 세계관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인신공양을 제안할 때만은 예외였다. 이때에는 제상을 죽 1필요가 생기는데, 영화의 제안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심이 된 희생에 곰의 가죽을 주는 것은 인간과 같은 동물 속에 내재하는 공격성 야수성을 정화하는 의미 1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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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런 제안을 통해서 자신이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 속의 1부이며 전체가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죽 음은 당연한 순환 과정 1뿐 고통은 전체가 함께 합니다는 점을 수용하게 되면 감정의 평화가 찾이프니다니다. 이렇게 써보면 마치 제가 이 홀이 공동체의 전도사가 된 느낌이에요.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대니는 제의로 치유되었다. 감독이 분명히 희시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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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통과 대나무 소리 문제에 대해 이 홀이 공동체와 매우 유사한 해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다. 물론 그가 인신공양을 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홀이 공동체의 그것과 놀랄 만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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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스터의 전작 유전도 비슷한 염세주의를 바탕으로 한 sound를 알 수 있다. 개별자는 무엇인가 더 큰 무엇인가를 "전승"해 연결하는 매체일 뿐, 그 역할을 완수하면 소멸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므로 운명에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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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불교적인 것 같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 수피즘 등 동양 종교를 탐독했고 거기서 서구 문명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비법을 찾아냈다. 동양뿐 아니라 고대 서구에도 이처럼 유사한 범신론적 순환론적 종교가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력을 얻고, 거의 이단 취급을 받아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홀거 공동체는 이처럼 자취를 감췄던 서구권의 고대 종교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종교적 정합성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대니가 그 속에서 심정의 평화를 찾았음을 납득할 정도다. 이런 불편한 역설 때문에 이 마을의 피부가 기괴하게 느껴진다. 외부인인 대니와 그 friend들의 이름에서는 기독교단 냄새가 난다. 대니는 구약성경 다니엘이지만 모략을 받고 사자취에 던져져 살아난 유대인으로 영화 속 대니와 포지션이 비슷하다. 대니의 남자친구는 노골적으로 이름이 크리스천이에요. 프렌드도마찬가지입니다.이름이 마크(마가), 조쉬(요호수아), 사이먼(시몬) 등 이스라엘 지도자, 예수의 제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아시다시피 개별적인 불멸의 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과의 사람이 따로 있고 인간은 각자 분리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면 개개인이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이런 영혼관은 서구 개인주의 문화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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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하나행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대니가 겪는 불행을 차마 외면하려 합니다. 크리스천은 대니에게 그다지 의지가 되지 않는 남자 friend이고, 의식적인지 서툰지 자주 대니에게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홀거가 공동체에서 온 펠레를 제외한 friend들은 우울증에 걸린 대니를 자꾸 떼어내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미드소마는 어떻게 보면 단절된 개인주의 화신들을 응징하는 내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드소마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일까. 그런 요소가 있긴 해. 그러나 그것은 마치[하나 3일의 금요일] 나쁘지 않는다[양들의 침묵이 살인을 비판하는 영화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관객을 놀라게 하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지 뭔가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홀거 촌락의 인신공양은 경악하지만 교리에 설득력이 있다. 그 제안의 야만성일 뿐, 요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 문명이 상실된 어떤 태고적 신성함 같은 것이 잇달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엄중한 모순 앞에 던져진 우리는 이것 저것 현미?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관객을 이렇게 경악시키는 것이 이 악취미를 가진 감독의 거짓이 없는 방안이겠죠.유전 때도 그랬지만 미드소마는 앨리 애스터 감독의 변태성을 더 정확하게 보여 주는 영화다. 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폰 트리에의 변태성을 전승하는 걸출한 감독의 출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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